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 [[독일 연방]] 해체, [[북독일 연방]] 승인 오스트리아가 의장으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며 30여개 독일계 국가들의 연맹으로 결성된 독일 연방은 해체되었고 전쟁 중에 프로이센이 점령한 [[독일 연방]] 영토[* [[하노버 왕국]], 나사우 공국, 헤센카셀 선제후국, [[헤센 대공국]] 북부 등.]는 프로이센이 병합하고 북독일의 모든 제후국들을 --강제로 가입-- 회원으로 한 [[북독일 연방]]이 오스트리아에서 승인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전쟁배상금 4천만 탈러(Thaler)를 부과받았다.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완전 해체 [[이탈리아 왕국]]은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게 졌기 때문에 발언권이 매우 적었다. [[롬바르디아]] 지역은 이미 1859년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시절에 1861년에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을 획득했고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왕국에게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베네토]] 지역 할양을 제시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새로 얻은 것은 없다.''' 이탈리아 왕국이 원한 오스트리아 제국 내 이탈리아인 우세([[트렌토]],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등)의 영토는 오스트리아에서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행정구역상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만 할양되었고 이탈리아인 우세지역 상당 부분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야 귀속되었다. [[카밀로 카보우르]] 사후 이탈리아 왕국의 협상력이 매우 떨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오스트리아에서 큰소리를 쳤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보유한 북이탈리아 지역 4각 요새[* [[만토바]], 페스키라 델가르다, [[베로나]], 레냐고.]는 "너희들에게 공짜로 못 주니 돈 주고 사든지 알아서 해라!"고 해서 이탈리아 왕국은 매우 난처한 처지였다. 결국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중재로 이탈리아 왕국이 오스트리아 제국령의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부채를 모두 인수하는 조건으로 요새와 영토를 인수했고 영토도 오스트리아는 전투에서 이긴 자존심이 있어 프랑스를 거쳐 국민투표를 한 후 이탈리아 왕국에 귀속되는 절차를 거쳤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하고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유서깊은 [[성유물]]인 [[롬바르디아 철관|랑고바르드 철왕관]]을 이탈리아에게 넘겨주었다. * 남독일 연방 결성 가능 프로이센이 신속하게 승리하자 매우 당황한 프랑스가 개입한 끝에 양보받은 사항이 프로이센의 [[작센 왕국]] 합병 저지였으며 또한 남독일 4개국의 연방 결성을 제시했는데 남독일의 헤센다름슈타트, 뷔르템베르크는 프로이센도 싫지만 남독일 연방이 결성되면 바이에른이 왕초노릇 할 것도 고까웠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의 구상과 달리 이 제안을 거부했다.[* [[바덴 대공국]]은 [[프리드리히 1세(바덴)|프리드리히 1세]]가 [[빌헬름 1세]]의 사위여서 애초부터 북독일 연방에 끼고싶어 했으나 남독일 다른 국가의 눈치를 보느라 들어가지 못했다.] 프로이센군은 쾨니히그레츠(사도바) 전투로 결정적인 승리는 얻었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모라비아 [[미쿨로프|니콜스부르크]]에서 회담을 진행중이었는데 프로이센은 회담과 별도로 점령전으로 나섰다. 북독일 거의 전역을 석권하고 바덴과 뷔르템부르크, 바이에른 영토 깊숙히 진군했고, 오스트리아 전선에서는 보헤미아를 석권하고 빈 60킬로 근방의 헝가리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까지 진격했다. 프로이센 군부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영토 할양을 받아야 된다는 주장도 있었고, 빈에 입성하는 것은 단순 영토 할양의 대가를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을 일소하여 재기불능 상태에 두려는 욕심도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어차피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축출한 마당에 프로이센의 영토적 이익은 독일 연방 제후국으로부터 얻는 것이 옳고, 프로이센군이 빈 근처에서 진격을 멈추면 오스트리아가 고마워할 것이라며 말렸다. [[빌헬름 1세]]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1814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추억을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평생 공유했다고 한다. 보불전쟁에서도 이러한 승전 퍼레이드를 요구했고, 비스마르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철했다.]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왕태자]] 또한 비스마르크 편을 들자 결국 뜻을 꺾었다. 이 때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겠다는 협박까지도 했었다. 사실 [[쾨니히그레츠 전투]] 이후 니콜스부르크에서 예비평화회담으로 전쟁 종료전 조건은 이미 거의 확정이 되었지만 이 사실을 잘 모르는 프로이센 여론은 똘똘 뭉쳐 비스마르크를 비난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늘상 하던 대로 국왕의 강력한 신임을 얻어 반발을 무시했고, 현실 정치를 들어서 반대했다. 비스마르크로서는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몰락시키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우위만을 인정받게 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프로이센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길게 공유한 데다 프로이센의 독일 내 우세권이 특히 남부 영방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에게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면 궁극적으로 독일 내 국가들에게 거부감을 줄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를 장기적으로 최소한 우호적인 중립국으로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다. [[프랑스 제2제국|독일 통일을 방해하는 더 큰 강적을 격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그 때는]] 적의 [[파리(프랑스)|수도]]를 털 수 있었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군을 철저하게 격파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를 우호적인 동맹국으로 남길 계획인 만큼 오스트리아의 군사력을 일정 부분 보존하는 편이 오히려 프로이센에게 유리했다. 또한, 오스트리아가 독일에서 배제되면 오스트리아 영토 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민족 인구 구성상 패전 후 독일계 국가에 더 의존하리라 예상한 것도 있다. 처음에 오스트리아는 비스마르크의 자비로운 대우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에 복수하려고 이를 갈았다. 보오전쟁 직후 [[대타협]]을 통해 기존의 제국을 이중제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편하여 [[헝가리인]]에게 통 크게 양보한 것도 골치아픈 헝가리 문제를 빠르게 끝내고 보오전쟁 대패를 설욕하는 데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심지어 크림 전쟁으로 관계가 악화된 [[러시아 제국]]에게도 손을 내밀어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넘겨주는 대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프로이센에 복수하려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 군부도 오스트리아의 제안에 호응했는데 러시아 정계가 거부했다. 러시아가 정말로 발칸 반도를 장악하면 이를 두고 볼 수 없는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해 제2의 [[크림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것. 결국 오스트리아는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프로이센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의 경험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치룬 첫 대규모 전쟁이었고 이 전쟁의 경험을 철저히 연구했다. 포병 부족으로 전투에서 패배할 수도 있었다는 것, 실제 철도 운영 중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등을 연구해 프로이센군의 전투력을 더 강력하게 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 육군이라는 강적을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군]]도 이 전쟁을 보고 더 좋은 소총을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신무기 도입 외의 노력은 하지 않았다.[* 샤스포에서 많이 해결되긴 하지만 당시의 후장식 소총은 아직 문제가 많은 물건이었고 무엇보다 프로이센군의 승리 원인은 무기보다는 그 체계에서 있었다고 봐야한다. 이어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구시대적 전략체계로 대응하다가 패배했다. ~~이거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프랑스 침공]]에서 본 것 같은데~~] 과거 [[영국]]과 100년 넘게 [[동군연합]]을 이루었다가 얼마 전부터 영국과 별도의 국왕을 두게 된 [[하노버 왕국]]은 오스트리아를 편들었다가 망했다.[* 옆나라 작센은 그래도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베틴 가문|왕가]]가 사라지고 멸망하는 건 피했지만 하노버는 프로이센 왕국으로 완전히 합병당했다. 그 결과 왕족들은 오스트리아나 친척 동네인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영국에서도 왕가의 뿌리이기도 하여 모른척 할 수 없는 하노버 왕국의 동향에 대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침 자유당에서 보수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등 내부에서의 격변이 심했던지라 결과적으로 대륙에서의 전쟁에 개입하지 못했다.] 이때 하노버 왕국의 금고는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북독일 연방]]이 고스란히 챙겼고 그 돈은 [[보불전쟁]] 때 [[바이에른 왕국]] 같은 남독일 영방 국가들을 구워삶는 데 쓰이는 등 잘 쓰고 다녔다. 또 이 돈으로 지은 유적지 중 하나가 바로 [[노이슈반슈타인 성]].] 그 외에도 [[헤센카셀 선제후국]]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나사우 공국]][* 이곳을 통치하던 [[나사우 가문|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아돌프(룩셈부르크)|아돌프 공작]]은 퇴위 당해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24년 뒤 먼 친척인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가 [[빌헬미나 여왕|딸]]만 남기고 사망하면서 졸지에 [[룩셈부르크 대공]]으로 즉위한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이 프로이센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작센 왕국]]은 프랑스의 견제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담으로 당시 [[리히텐슈타인]]도 오스트리아 측에 총 80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공국을 다스리는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하로 종주국의 전쟁에 종군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리히텐슈타인군 부대는 [[티롤]] 지역에 별다른 교전 없이 주둔했다가 전쟁이 끝난 후 귀환했다. 복귀할 때는 병력이 81명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군에서 탈영한 군인 1명이 같이 왔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